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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나비 오디세이 2007. 1. 3. 06:52

<김약국의 딸들>을 다시 읽었다. 며칠 전 거제도를 다녀오고나서 다시 읽고 싶은 마음에 잡은 책에서 깊은 감동을 느꼈다. 처음 읽을 땐 느끼지 못했던 감동이다.

 

김약국(김성수)에게는 딸이 다섯 있다. 첫째 용숙, 둘째 용빈, 셋째 용란, 넷째 용숙, 다섯째 용혜다. 첫 아들이 있었으나 어려서 병으로 죽었다. 불행은 불행의 꼬리를 물고 계속 김약국 집을 뒤흔든다. 한시도 가만두지 않고. 사람들은 말한다. 김약국은 딸들이 다 망하게 했다고.

 

 

김약국의 불행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 시대적 배경에서부터 연관을 지을 수 있다. 김약국이 태어나기 전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던 시대는 1864년. 대원군의 집권시기다. 그러다 1866년 병인양요를 겪고 패권이 다시 민비에게 넘어간다. 이 시기는 청 일 두 세력의 대립, 민씨파와 대원군파의 암투, 개화파와 보수파의 갈등, 개화파 중에서도 일본식을 따르자는 친일파, 청국식을 따르자는 사대파, 이러한 파벌의 발호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국운은 차츰 기울어만 가는 시기다. 김약국의 불행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있다.

 

김약국은 한 살이 채 되기전에 큰어머니 손에 키워진다. 어머니는 비상을 먹고 자결하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옛애인을 죽이고 도망쳤다. 큰어머니는 항상 '비상먹고 죽은 어미 자식은 키우는 게 아니라는데...'를 입에 달고 산다. 그러면서 성수를 키운다. 아버지를 닮아 성수는 신체가 가늘고 얼굴선이 곱다.

 

세월은 흘러 임오군란(1882,고종19년), 갑신정변(1884,고종21년)이 일어났다. 일본, 청국, 노국, 영국까지 각기 도마 위에 놓인 고깃덩이처럼 조선을 서로 먹겠다고 으르렁 거렸다. 이런 외환에다 거듭되는 악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민란이 동학란이다. 이 시기를 거치고 성수는 결혼을 한다.

 

성수가 서른둘 되는 해, 1910년 8월 29일(치욕적인 한일합병조약)에 아들 용환이 마마로 죽는다. 송씨(큰어머니)도 2달후 죽는다. 세월은 무섭게 흐른다. 이런 정황에서도.

 

한일합병후 20년이 흘렀다. 첫째딸 용숙은 24살, 과부다. 물욕이 대단하다. 둘째 용빈은 청수하고 지적이며 집안에서 아들 역할을 한다. 셋째 용란은 아름다운 육체를 지녔으나 생각이 없다. 넷째 용옥은 투박하게 생겼으나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잡초 같은 삶이다. 다섯째 용혜는 12살 어린 소녀다.

 

집안을 풍비박산내는 데 용숙과 용란의 행적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용숙은 친정에만 오면 숟가락하나라도 가져가려 하는 사람이고 용란은 생각이 없는 사람의 전형으로 백치에 가까운 치정을 일으킨다. 이러한 중에 가산은 점점 줄어들고 집안은 쑥대밭으로 변해간다. 용빈은 서울에서 여학교 선생님을 하고 용옥은 집안에서 어머니를 도와 가정살림을 꾸려나간다.

 

용숙은 어느 날 영아살해범으로 유치장에 끌려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물에서 영아의 시체는 인양되지 않았고 용숙은 풀려난다. 풀려날 때 가관이다. 그런 유형의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행동들.

용란은 집안의 하인격인 한돌이와 바람이 났다. 동네가 떠들썩하게. 성불구자에 아편쟁이에게 시집을 가게된 용란. 용숙과 용란은 한실댁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일제의 압제에 시달리는 우리네 민초들의 가슴에 내는 상처와 고통을 암시한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행동들이 용숙과 용란을 통해서 간접으로 전해진다. 한실댁의 가슴에 응어리가 맺혀지고 김약국의 가슴에 암덩어리가 자라게 하는 원인이다.

 

용란은 아편쟁이 남편으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하며 산다. 성적 구실도 못해 늘 불만인 용란은 백치처럼 살아간다. 우적우적 먹을 것만 밝히고 거지형세다. 멀리 달아났던 한돌이 돌아와 사건은 파국을 맞는다. 한돌이와 만나 달아나려고 하는데 아편쟁이 사위가 알까 두려워 한실댁은 이를 구하려다 사위의 칼에 맞아 죽고 만다. 이로인해 용란은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끝없이 끝없이 괴롭히던 용란, 이를 감싸던 어머니 한실댁의 죽음. 광기와 죽음. 어쩌면 그 시대는 그러한 시대였음을 깊이 내포하고 있다. 일제시대는 우리에게 광기와 죽음이 난무했을 터. 나는 지나간 시대의 어른들이 내뱉는 덧없는 한숨소리로만 들을 수 있었기에 그 시대의 참상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점점 잊혀져가는 과거에 우리의 선조들이 겪은 아픔을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 

 

때론 어떤 아픔이 직접적인 표현보다 간접적인 표현이 더 아프다. 

 

용옥은 소리없이 낮은 데서 어머니를 도운다. 용숙과 용란 두 언니들의 행동을 비난하거나 비판하지도 않고. 그리고 용빈을 닮고자 하는 마음만 간직한 채 신에게 기도하는 삶이다. 용옥은 아름답지 않다. 남편은 그런 그녀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다. 원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지만 그래도 너무한다. 용옥은 시아버지가 겁탈하려하자 달아나 남편에게 갔다. 부산에서 일하던 남편은 용옥이 찾아갔을 때 통영으로 가고 없었다. 갓 돌이 지난 아이를 업고 다시 배를 타고 통영으로 출발했다. 작은 배에 너무 많은 짐과 사람들이 탔다. 거대한 풍랑이 인 것도 아닌데 배는 침몰하고 거기 탄 사람들 모두 죽었다.

 

나는 용옥의 죽음앞에 엉엉 울었다. 그녀의 삶이 고스란히 고통으로 가슴을 에이게 했다. 한동안 책을 읽을 수 없었다. 한 여인의 죽음에 이토록 울었던 적이 있던가. 소설속의 인물이지만 나는 그녀의 삶이 애처롭고 안타깝기만 하다. 용숙과 용란은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다. 그러나 용옥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다. 자초하지 않았지만 주변인들로 인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만드는 형국. 그런 형국에서 그녀가 맞이한 죽음은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는 부분일 수도 있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이러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질박한 통영(남도)사투리가 구수했고 줄거리 중심으로 김약국의 파멸이 곧 나의, 우리의 파멸로 이어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긴 했으나 각 개인의 삶에 눈을 돌리진 못했다. 특히 용옥의 삶에. 지적이고 아름다우며 청수한 용빈의 삶에 조명을 비추었지 용옥은 소설속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 처럼 독자에게도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두번 째 읽기에서는 그녀의 삶이 왜이리 가슴을 쳤던 것일까. 아마도 김용옥선생님의 영향이 있었던 듯하다. 김용옥 선생님의 삶도 평탄하지 않고 소설속 인물 용옥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용빈은 소설 전체를 아우른다. 아버지 김약국의 삶을 정리하고 조명한다. 그리고 그녀는 미래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번 <김약국의 딸들>은 내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고 박경리의 문체에 매료되게 했다. 간결한 문체 속에, 탄탄한 소설의 구성에 빠져들게 했다. 문장 하나하나에 배여 있는 깔끔함. 그녀의 소설들 전부를 섭렵하고 싶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