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누기/글마당

바닥/ 슬픈 샘이 하나 있다

나비 오디세이 2016. 6. 11. 00:52

   바닥


     문태준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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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샘이 하나 있다


                문태준


  맹꽁이가 운다

  비를 두 손으로 받아 모으는 늦여름 밤

  맹꽁이는 울음주머니에서 물을 퍼내는 밑이 불룩한 바가지를 가졌다


  나는 내가 간직한 황홀한 폐허를 생각한다

  젖었다 마른 벽처럼 마르는

  흉측한 웅덩이


  가슴속에 저런 슬픈 샘이 하나 있다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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