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고전속의 여신들

나비 오디세이 2005. 11. 28. 11:12
 

고전속의 女神들


헤르만 헤세 ‘지(知)와 사랑’의 어머니


  돌아가신 아버지는 가슴속에 한 여인을 품고 계셨습니다.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가 지갑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여인은 당신의 어머니였습니다. 외롭고 쓸쓸할수록 절박해지는 이름, 어머니!

  어머니는 사랑이고 소망이어서 인내의 원천입니다. 내 안에 어머니만 있다면 극한 상황도 견딜 수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인생에 대해 이르길 ‘자기 자신에로 향하는 길’이라 했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내 안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인생을 살고자 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리 어려웠을까?”

  <데미안>에는 ‘에바부인’이, <지와 사랑>에서는 ‘어머니’가 그 길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지와 사랑>에서 어머니는 진창 같고 산만하고 허술한 골드문트의 인생을 매혹적으로 빛나게 하는 이유입니다. 에바 부인이나 어머니나 모두 내 안의 여신(女神)이고 아니마입니다.

  사람은 가혹하고 막막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믿어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길을 찾습니다. 자신을 믿어 주는 그 사람은 자신의 길을 인도해 주는 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 안의 여신 혹은 여신을 깨우는 아니마인 거겠지요.

  <지와 사랑>은 내 안의 여신, 어머니가 이끄는 대로 길을 따라가는 골드문트가 주인공입니다.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내 안의 어머니를 믿어야 합니다. 물론 <지와 사랑>에서 어머니는 실재의 어머니라기보다 원형적 심상입니다. 심상이라고 실재가 아니라 상상이나 허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진짜로 고혹적인 것은 모두 내 안에 내재하기 때문입니다. 내재신(內在神)을 느끼는 것이 신비이고 초월입니다.

  내재하는 여신 어머니는 신비이고 그리움입니다. 길이고 힘입니다. 어머니는 선악을 초월하고 논리를 초월하는 생(生)자체입니다. 골드문트는 그 심상이 이끄는 대로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사랑이 충만해지면 사랑을 나누고, 사랑이 그를 버리면 버림받고, 몰입을 하게 하는 일이 있으면 머물고, 떠나야 할 때 떠납니다. 그를 따라가다 보면 행복은, 감각적 쾌락도 아니고, 충만한 사랑의 지속도 아닙니다.

  사실 늘 행복하다고 노래하면 그것은 미친 거고, 늘 슬프다고 가라앉아 있으면 그것은 우울증입니다. 진짜 행복은 감각적 쾌락이 끝난 뒤의 허무까지 충분히 받아 낼 줄 아는 능력이고, 충만한 사랑 뒤의 이별의 슬픔까지 기꺼이 소화해 낼 줄 아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행복은 내 안에서 희로애락이 막힘 없이 흐르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인 겁니다.

  조각가인 골드문트에게는 마음에서 반복되는 어떤 형상들이 있습니다. 그 형상이 자라 그 형상을 표현하고자 할 때 그는 그 형상을 조각으로 옮길 때까지 꼼짝없이 몰입합니다. 그리고 조각이 완성되면 찬란한 기쁨도 잠시, 깊은 허무감을 안고 더 이상 자신의 손을 기다리지 않는 조각을 훌훌 떠나는 거지요.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예술가로서의 명성이나 그 명성이 가져다줄 안락이 아니었으니까요. 그에게 예술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열정의 표현이고 폭풍우 같은 힘을 받아 줄 공기였던 겁니다.

  생 자체를 조각하고자 했던 골드문트의 꿈은 어머니상(像)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상을 형상화해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고백합니다.

 “어머니를 만든다는 건 가장 귀하고 신비한 꿈이었어. 어머니상은 모든 상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거였으니까. 그걸 형상화해 내지 못하고는 생 자체가 무의미한 거였지. 그런데 이제는 이상하네. 이상해진 거야. 지금에서야 느끼거든. 내 손이 어머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날 만들고 있었다는 걸.”

  어머니가 날 만들고 있었다! 어머니를 느끼며 살아왔다!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인생이야말로 자연스런 인생이고 축복받은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