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고

나비 오디세이 2006. 7. 14. 23:11
 

진한 페이소스, 그 물결에 휩싸여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고


  초등학교 시절이었던가. 이 책을 읽으면서 무척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 소설의 의미나 작가가 말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에는 어린나이였을까. 그저 제제의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이 되어 엉엉 통곡을 하듯 했다. 어른 된 지금 읽어보니 예와 마찬가지로 진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고 그와 더불어 진정한 의미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저변에 깔고 있음을 알겠다.

  이 책은 저자 바스콘셀로스의 자전적 소설이며 성장소설이다. 동화적 구성에 ‘제제’라는 다섯 살 꼬마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 시각에서 어른들을 보게 한다. ‘제제’는 꼬마라고 부르기엔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이다. 그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불평등과 불공평하기만 하다.

  장난꾸러기 제제는 늘 매를 맞고 꾸중을 밥 먹듯이 듣는다. 제제의 장난은 어른들의 시각에서만 보면 매를 맞을 일이지만 어린 아이의 시선에서 마주보기를 했더라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상상력을 북돋우며 확산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생각하게 한다.

  어떤 저의도 없고 악의도 없는 아이의 세상에서 그 장난이 큰 체벌로 돌아왔을 때 제제는 상처를 받고 자신에 대해 부정적이고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아이로 성장하게 된다. 제제는 글로리아 누나에게 외친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라고. 그 외침은 어린 제제의 절규와 같은 몸부림이다.

  체벌의 단계가 극에 달한 아버지의 매질 장면은 독자들의 가슴을 에이게 한다. 칼로 도려낸 상처에 또 칼을 대는 아픔이 읽는 이에게 전이되어 제제가 되어 울게 한다. 그 순간 모든 감각들이 일순 정적 속에 잠겨 버린다. 명치끝이 가시바늘에 콕콕 찔리는 듯한 고통이다. 이 순간 아이의 심리를 이해해 달라고 말하기 전에 아빠의 행동이 미칠 파장을 생각하게 한다. 글을 읽는 어린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만일 그런 체벌을 받은 적이 있는 아이라면 동질감을 느끼고 제제의 기분을 다른 누구보다 더 이해하겠지. 그리고 겪어 보지 못한 고통이라면 이러한 체벌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충격이 주는 효과라고 할까. 초등시절 읽을 때 제제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깊이 각인 되어 지금도 그때의 감정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후 체벌에 대한 반대 입장이 확고해졌다.

  물론 아버지의 체벌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단지 아이의 입장이 아닌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를 바라보았고 아버지가 자신의 감정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쨌거나 상처 받은 제제를 다시 일어서게 하고 삶의 끈을 잇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다. 밍기뉴(라임 오렌지나무), 엄마, 글로리아 누나, 뽀르뚜가 아저씨 등이다. 만일 그들의 존재가 없었다면 제제는 어찌 되었을까. 상처투성이의 갈가리 찢긴 영혼으로 성장하여 뒷골목을 전전하는 삶이지 않았을까. 상처를 보듬고 안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성장에 보약과 같다. 아니 절대 필요불가결한 생명수라 함이 옳다.

  특히 밍기뉴는 어린이에게나 어른에게나 필요하다. 라임 오렌지나무의 존재는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 같이 살고 같이 죽는 존재인 것이다. 제2의 자신이다. 마음속에 간직한 또 하나의 나의 영혼이 있기에 고통의 인생길에서 울다가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밍기뉴 곧 라임오렌지나무가 있다는 것은 고난의 역경 앞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자신을 조절할 능력이 자생하게 되는 것이다.

  뽀르뚜가 아저씨에게 망가라치바에 뛰어들겠다고 말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은 극도로 흥분되어 있고 상처가 곪을 대로 곪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뽀르뚜가 아저씨는 귀담아 들어 주었다. 제제는 고열과 구토에 시달리며 죽을 것 같던 시간들을 보낸다. 망가라치바에 뛰어들겠다던 제제를 지켜주고 뽀르뚜가 아저씨가 망가라치바에 치이게 되는 사건은 제제가 어린아이에서 또래보다 더 많이 성숙한 아이로 크게 한다.

  어린이에게서 이상성과 환상성은 현실도피가 아닌 꿈과 희망이며 더 많은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창조자가 되기 위한 전단계이다. 제제는 뽀르뚜가의 죽음으로 인해 그 환상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아버지가 직장을 얻고 제제에게 사과를 하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지만 예전의 제제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제제가 말하는 진정한 삶을 노래한 시를 적어본다.

  “저를 놓아 주세요, 샘물님

  꽃이 울며 말했습니다.

  나는 산마을에서 태어났어요.

  나를 바다로 데려가지 마세요.

  그곳에선 하늘하늘 가지를 흔들었지요.

  그곳에선 푸른 하늘에서 청초한 이슬방울이 떨어졌지요.

  차갑고 명랑한 샘물은 소곤소곤 속삭이듯

  모래밭을 달리며 꽃들을 실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