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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를 읽고

나비 오디세이 2006. 7. 21. 23:32
 

길 위의 길

<연금술사>를 읽고

파울로 코엘료/최정수 옮김


  가물어 쩍쩍 갈라져 그물이 쳐진 대지에 장대비가 내린다. 시원스레 뿌리는 그 물줄기가 신의 선물처럼 느껴진다. 단비다. 그러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장맛비에 또 집중호우가 쏟아진다면 하늘의 재앙처럼 느껴진다. 재앙은 인명을 앗아가고 골 패인 얼굴에 더욱더 깊은 수심을 만들어 놓는다. 흙탕물, 쓰레기들, 그 속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안쓰럽다.

  단비 맞아 꽃향기 날리는 길이, 재앙의 비를 맞아 진흙탕이 된 가시밭길이 손짓을 한다. 길은 내 선택의 결과로 내 앞에 있는 것이다. 어떤 길이든 내가 선택한 것이므로 책임은 나에게 있다.

  꽃길이든 가시밭길이든 가다보면 눈길을 끄는 영상들은 많다. 꽃길에 꽃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또 가시밭길에 가시만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가시밭길 가는 중 깎아지른 절벽에 천하절색의 아름다운 꽃이 손짓하기도 하고 길가 발치에 다소곳이 피어 있는 들꽃들이 수줍은 미소를 보내기도 한다. 그 순간을 담고 영원으로 가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주인공 산티아고는 피라미드를 향해 길을 간다. 피라미드는 곧 ‘자아의 신화’이며 ‘꿈’이다. 작가는 서두에 ‘각자의 몫’에 대한 언급을 한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 몫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라고 <누가복음>의 말씀을 적고 있다. 이는 이 책의 주제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자아의 신화’는 연금술사의  몫이 있고 산티아고의 몫이 따로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프롤로그 또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르키소스의 전설의 결말이 아니다. 오스카와일드의 결말은 변화와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애도하던 호수들이 진정 슬퍼했던 이유는 나르키소스의 죽음이 아니라 호수를 바라보던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운 눈을 통해 자신들을 볼 수 있었다. 호수는 그 일을 할 수 없음에 흘리는 눈물이었던 것이다. 이는 나르키소스가 자신을 사랑하여 자살한 것보다 한층 더 높은 이기의 모습인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없는 세계는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또한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고 있는 듯 착각하게 되지만 '나'라는 존재는 작고 참으로 미미하다. 망망대해에 한 조각 낙엽이다. 허나 그 미미한 존재들이 모여서 지구촌을 만들었다.

  '나'를 대변하는 젊은 양치기 산티아고가 양들은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며 새로운 길에 관심이 없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자아의 신화’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곧 양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양과 같은 사람들은 주인에 의해 조종당하며 그들이 먹이를 주는 것에 만족하고 자신의 꿈은 검은 대지에 묻어 둔 채 현실에 안주하여 생활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작가는 보일 듯 보이지 않게 독자에게 경종을 울린다.

  반대로 산티아고를 닮은 사람들은 낡은 교회 앞, 무화과나무 아래 성물 보관소 자리에서 똑같은 꿈을 두 번 꾸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 끈을 놓치지 않고 있는 자에게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혜택이 주어진다. 현실세계의 인도자 점성가와 신의 세계의 인도자 늙은 왕은 상징적으로 등장하여 꿈으로 가는 길을 밝혀준다.

  “이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이 하나 있다.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둥근 원 같은  마음이다. 틈이 있으면 안 된다.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원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전제를 두고 위대한 진실에 접근해보자.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 내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에 부과된 유일한 의무라고 강조하는 작가의 마음을 읽어 보는 것이다.

  산티아고가 ‘자아의 신화’를 포기하려는 순간에 진리의 음성이 들린다.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 지나가 버릴 수도 있는 그 음성. 순수하게 마음을 열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꿈을 이룰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 마음의 세계를 읽는 것이다. 언제고 나를 막는 것은 나이다. 또한 나를 밀고 가는 것도 나이다. 행위의 주체는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꿈을 보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털 상인과 같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우리 주변에 부지기수다. 그 사람들이 꿈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단지 꿈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꿈을 먹고 사는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 한 사람 영국인이 등장한다. 그는 연금술사가 되기 위해 부친이 남긴 전 재산을 꿈으로 가는 길에 쏟아 붓는다. 그는 의자에 앉아 책만 읽는 지식인이다. 오만한 태도를 보이지만 결국 연금술사가 한 말을 따른다. “연금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럼 그대가 “직접 해보라.” 는 단 한 마디 말을 남길 뿐이다. 그때 영국인은 깨달음을 얻는다.

  길을 가다가 아름다운 영상이 있으면 바라보고 느끼고 음미하는 것은 영양제와 같다. 오감으로 체득하고 순간을 받아들이는 현재의 삶을 사는 지혜, 그것은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지친 영혼을 달래주는 역할을 한다. 인생은 사막과 같은 것. 사막 길을 가다가 낙타의 행렬을 바라보거나, 바람소리를 듣거나, 낙타와 친해지는 것은 오아시스를 만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 속에 산티아고는 연인을 만나게 된다. 파티마를 만나고 그것으로 그의 꿈은 종착역에 닿았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런 산티아고를 파티마가 제지한다. 사랑을 얻었다고 자유로운 선택의 길을 놓아버릴 것이 아니라 가던 길을 가야한다고 단호히 말하는 여인의 사랑에서 생각한 바 크다. 사랑은 소유가 아닌 길을 밝혀주는 등대 같은 것이며 소유가

아니라 같은 길을 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파티마는 자신의 삶의 연금술이 무엇인지를 아는 여인이라 여겨진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이의 꿈을 가로막는 우를 범하지 않는 현숙한 여인의 성숙한 사랑, 진정한 사랑을 눈으로만 읽지 말 것을 당부한다. 마음으로 읽고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그대 마음에 귀를 기울이라. 모래 알갱이 하나를 들여다보기만 해도 마음속에서 천지창조의 모든 경이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변덕쟁이 마음, 간사한 마음도 나의 마음이다. 곧 살아 있음의 증거이니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아무도 자기 마음으로부터 멀리 달아날 수 없는 법.

  ‘네 삶의 진정한 연금술사가 되어라.’작가는 줄곧 독자에게 속삭인다. 잠시도 독자에게 틈을 주지 않고 귓가에 스스로 행동하여 깨달음을 얻고 타인의 꿈을 방해하지 않아야 함을 각인시킨다.

  침묵, 절대고요의 순간에 감사와 간구, 소망이 아닌 만물의 정기, 신의 정기, 곧 자신의 영혼과의 대화를 이끌어 낼 것을 강조한다. 우리 모두에게 ‘자아의 신화’는 모두 개별성을 띠며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 신화를 쫓아가며 끊임없이 자아와의 대화가 있는 길, 그 길 위에 길이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자아의 신화’는 완성된다.

   연금술이란 절대적인 영적세계를 물질세계와 맞닿게 하는 것일 뿐이다. 연금술의 존재 이유는 우리 모두 자신의 보물을 찾아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