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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을 읽고

나비 오디세이 2006. 8. 29. 06:22
 

진정한 만남

‘데미안’을 읽고


  진정한 만남이란 마음으로 이해하는 만남이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고 영과 영이 만나서 서로를 주고받을 수 있는 만남은 아름답다. 지상 최고의 만남이라 여겨진다.

  내가 처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만난 것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중학교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유명세(有名稅)와 꼭 읽어야 한다는 각종 매체의 글들이 <데미안>을 만나게 했다. 그때는 눈(眼)이 먼저 만났고 그저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었다. 그래도 마음에 와 닿는 구절들은 있었고 어떤 감동이 있었다. 안 읽은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은 그 처음의 만남이 다음의 만남으로 이어지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거니와 낯설음이라는 장벽을 넘어서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만난 것은 30대 때이다. 헤르만 헤세의 다른 책들을 (<지와 사랑>, <싯타르타> 등) 읽다가 학창시절에 한 번 읽었던 데미안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책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책을 구입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오타가 많았다. 책을 읽으면서 오타가 많으면 그 책에 집중했던 그 기(氣)가 감소되어 읽는 속도와 감정몰입이 일시 중단되는 것을 느낀다. 그럼 참 기분이 별로다. 그래서 출판사에서는 오타와 띄어쓰기에 주의를 기울여 주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보았다. (주제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잠시 했다.) 

  이때도 나의 마음과 나의 독서능력은 작가의 마음을 완전 이해하고 읽는 책읽기는 아니었다. 학창시절보다 진전은 있었지만 작가의 그 깊은 성찰과 내면으로의 여행을 나타내는 어휘들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주제에 접근하기는 했으나 그 주제를 마음 깊이 이해하고 깨달음, 자각(自覺)에 이르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요즘에 다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다시 잡은 계기는 어떤 강의에서 <데미안>은 소설이 아니라, 장수필(長隨筆)이라는 말문이었다. 수필은 소설과 다른 장르가 아닌가. 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좀 어려운 소설이거나 자전적 성장소설이라는 생각만이 나의 세계였는데 내가 알고 있던 그 세계가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전에 내가 작가를 만남에 오류가 있었다는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지나갔다.

  그렇다.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 말을 전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데미안>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 한 자 수를 놓듯 피 맺힌 절규처럼 들리는 장수필에 가깝다. <데미안>은 작가가 유년기에서부터 청년기에 겪은 정신적 고뇌와 삶의 전면에 흐르는 운명의 흐름을 자각하는 과정이며 진정한 자아와의 만남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서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책이다. 자기 자신에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고 알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이며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결코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의 힘으로는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유년시절에 ‘나’의 세계는 아버지의 세계, 곧 밝고 선하고 따스하고 온유하고 향기가 가득한 그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던 ‘나’가 그 아버지의 세계 그 울타리 안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뜬다. 두 세계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울안에 공존하면서 나를 혼란에 빠뜨린다. 유년기의 가장 큰 시련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와의 만남은 프란츠 크로머라는 상급생에 의해서다. 우연치 않은 거짓말로 그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버지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슬퍼하는 어린영혼의 심리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결국에는 아버지의 존엄성과 위엄성에 대면하고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최초의 균열이 온 시기이기도 하다. 소년시절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기둥, 아버지에게 가해진 최초의 균열은 각자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스스로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작가와 같은 경험을 가진 유년기 어린이들이나 경험이 없다 하더라도 이 책이 말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남음이 있는 부분이다. 분리의 아픔은 이 시기의 어린 영혼이 감내해야할 가장 큰 아픔이 아니겠는가.

  어린 영혼이 날개를 파닥이며 안타까운 상태에 처해 있을 때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또 다른 상급생, 데미안이 있다. 그는 나의 사슬을 풀어 준다. 크로머에 묶여 있던 나를 구해준다. 나 스스로 사슬을 풀지 못한 나는 진정 홀로 서기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나에겐 또 다른 나쁜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데미안은 작은 문제를 해결했으나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크로머는 단순한 눈에 보이는 ‘악’이었으나 카인의 후예, 카인의 표적에 관한 이야기는 나의 정신세계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신의 존재와 기존의 질서를 뒤집어엎는 성서의 다른 해석은 어린 나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는 데미안이야말로 카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는 또 다른 유혹자로 내가 알고 싶지 않았던 다른 나쁜 세계를 눈뜨게 한 데미안이야말로.

  데미안은 신이란 고귀하며 마치 아버지의 존재와 같이 아름답고 높으면서도 다감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세계도 존재하고 있으며 그 세계의 존재가 묵살당하고 은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을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찬양하면서도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성생활은 전적으로 묵살하고, 악마적인 것으로 단정해버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여호와를 숭배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를 인정하고 신성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인된 신적인 세계와 금지된 악마의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 옳다고 역설한다. 그러한 것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여린 나, 그러나 그 소리는 데미안이 곧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세계의 깨달음은 무엇인가를 증명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 같았지만 썩 기꺼운 것은 아니었으며 거기엔 가혹하고 떫은 맛이 있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인생에 대한 책임감과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인식이 내재한 떫음, 가혹이 아니겠는가.

  내면의 소리를 인식한 나는 데미안을 떠나보내고 홀로 서기 위해 몸부림친다. 데미안이 곧 나의 내면이기에 데미안을 부를 수 있는 사람도 자신임을 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외로움과 고독과 정면으로 대응하고 16살 청소년이 겪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정신의 혼미한 상태를 경험한다. 세상은 어둠이었다. ‘책은 단지 종이조각이었고 음악은 소음에 불과했다. 가을이 되면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져 주위에 쌓이기 마련이었지만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비가 나무를 적시고 혹은 햇빛이 혹은 서리가 내리고, 나무의 내부에서는 생명이 서서히 위축되고 깊숙이 움츠러든다. 그러나 나무는 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다림인 것이다.’라고.

  김나지움 소년 기숙사에서 기거하게 된 나는 타락의 세계로 빠져든다. 금지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 ‘나’는 그 세계로 한없이 빠져들어 온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 세계에서도 나는 외롭고 완전하게 그 세계의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데미안은 잠시 침묵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데미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면에서는.

  또 다른 데미안인 여인,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나는 타락의 세계에서 발을 빼게 된다. 이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이는 장면이다. 청소년 시기에 모두가 겪는 고통인 성적인 문제와 그러한 문제에서 돌파구는 지고지순한 한 여인일 수도 있고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베아트리체’가 각기 다른 형상으로 누구나에게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베아트리체’의 장을 만든 것이리라. ‘나’에게 베아트리체는 실체의 여인이라기보다 이상형으로서, 영상으로서, 영혼의 일부로서 존재하며 나타난 그 즉시 나를 변화시켜준 안내자이다. 그녀를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녀가 존재한다는 이유하나로 나, 싱클레어는 악의 세계를 탈출하였고 다시금 이전의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다시 책을 읽을 수 있고 혼자 있을 수 있으며 사원의 기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베아트리체의 역할은 끝났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베아트리체를 그리려고 했던 것인데 점차 그 모습은 데미안을 닮아 있었다. 아니 데미안 이었다. 데미안은 곧 나, 싱클레어였다. 나는 나를 그리워하다가 다시 나를 찾은 것이다. 그 그림은 나의 마음이었고, 나의 운명이며, 혹은 나의 데몬이었던 것이다.

  ‘나’는 꿈을 꾸고 또 다른 그림을 그리기로 한다. 그 꿈은 매의 머리를 가진 한 마리의 커다란 새가 푸른 하늘은 배경으로 어두운 지구에 박혀 있었고 커다란 알에서 깨어 나오려는 것처럼 몸부림치고 있는 형상의 꿈이었다. ‘나’에게서 잠시 떠나가 있던 데미안에게 나는 이 그림을 그려서 보낸다. 나를 찾는 의식이다. 나의 꿈을 이해하고 나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단지 데미안 한 사람 뿐이라는 것을 안다. 내면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 형태를 나타내며 이 책에 등장한다. 내가 데미안을 부르는 의식도 그렇고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것도 그렇고 피스토리우스를 만나는 장면도 그렇다. 특히 대지의 여신이며, 모든 존재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에바부인을 만나고 그녀를 부르는 의식은 진정한 나의 세계를 찾는 이의 피 흘리는 사투와도 같은 정신의 집중을 요구한다. 그러한 길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를 만나는 길은 험하고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 히말라야를 등정하는 것보다 더 힘든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작가는 누누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자신과의 만남은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이 글은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보낸 편지의 답신이다. 학창시절, 그리고 30대의 독서에서도 이 글은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심금을 울리며 알에서 깨어나오려고 몸부림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또한 마찬가지로 흥분하여 몸을 떤다. 데미안은 나를 이해한 것이다. 그것에 전율한다. 그런데 아프락사스는 무엇인가? 그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피스토리우스다. ‘나’의 내면의 길인 데미안이 보낸 사람인 피스토리우스와의 대화는 ‘나’를 더 깊숙한 나의 내부로 들어가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나의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였을 뿐이며 새로운 신, 아프락사스를 제시하는 사명은 부여받지 못했다.

  피스토리우스와의 대화에서 인식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와, 불꽃을 관찰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인식의 불꽃이 튄다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 세계를 지니고만 있느냐와 혹은 그것을 의식하고 있느냐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예시들이 이해를 돕는다. 인식의 불꽃이 튀지 않은 상태에 잇는 사람은 나무나 돌, 짐승에 다를 바 없다. 걸을 수 있다고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식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면 진정으로 한 인간이 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리고 불꽃을 관찰하는 장면은 우리들의 정신을 정화시켜주는 그 어떤 무엇이 누구에게나 필요함을 느끼게 했다. 꼭 불꽃 관찰만이 아니겠지만 누구에게나 정신을 정화하며 몰입할 수 있으며 집중할 수 있는 한 가지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나를 향해 갈 수 있는 길을 한 걸음 더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또 다른 나, 데미안이 보낸 사람 피스토리우스의 역할이 단지 내 자신의 내부를 발견하는 일을 더 깊게 했다면 그로서 그의 사명은 아프락사스, 새로운 신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새로운 신, 선(善)이며 곧 악(惡)인 신의 세계는 없는 것이다. 새로운 신을 원한다는 것은 잘못이며 이 세계에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거짓이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외친다. “각자를 위한 진정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단 한 가지뿐이다.”라고. 깨달음 이후에 인간의 본질의 문제는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일이며 그것을 온전하게 끝까지 지켜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 깨달음 이후에 자각한 사람은 더 깊은 고독 속으로 잠겨들어 간다. 이는 외로운 항해가 아닌 진정한 동반자인 자기 자신으로의 길임을 암시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나’의 의식의 부름에서 에바부인을 부르는 의식은 나의 꿈으로 들어가는 의식과 상통한다. 내 꿈의 여인이며 내 무의식의 아니마로서 존재하는 여인, 데몬인 동시에 어머니이며 또한 운명인 동시에 애인인 에바부인을 만난다. 에바부인도 아프락사스의 한 단면이겠지. 베아트리체나, 피스토리우스처럼, 데미안처럼.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영의 세계를 암시한다. 어머니라는 존재. 아들에게 어머니는 성적으로 처음 눈을 뜨게 하는 동시에 신성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아버지의 세계와는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나의 아들을 생각하면서 이 부분을 읽었다. 남자 아이의 심정을 헤아리는 입장이 되어 이 글을 읽으니 결혼 전에 읽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일었다. 그리고 사내아이의 감정을 한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고 이해하도록 애써야 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했다.

  ‘나’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 시기에 세계에 전쟁이 일어난다. (1차 세계대전) 이와 맞물려 생각해본다. 새가 알에서 나오려면 그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했다. 그 알은 세계라고 했다. 전쟁도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세계가 전쟁과 영웅주의를 , 명예나 그 밖의 낡아빠진 이상을 완고하게 고집하고 있는 듯이 보이면 보일수록, 표면적으로는 인간성의 모든 음성이 멀리서 들릴 듯 말 듯 울릴수록, 이 모든 것은 마치 전쟁의 외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에 대한 질문처럼 피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가장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었다. 새로운 인간성과 같은 그 무엇이었다.” 작가의 이 말에서 전쟁과 새로운 인간성의 창조는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어쩌면 그런지도 모른다. 전쟁은 내심(內心)의 방사이며 새롭게 태어나기 위하여 미쳐 날뛰고 죽이고 파괴하고 스스로 죽어버리려고 하는 내부에서 분열된 영혼의 방사에 불과한 일인지도 모른다. 전쟁터에서 만난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그들이 넘어야할 '벽'처럼 여긴 프라츠 크로머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크로머나 다른 어떤 일로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부르면 이전처럼 말을 타고 달려오지 못할 것이며 그때는 자신의 내부에 뒤를 기울여야만 하고 데미안은 자신의 내부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청소년기든 어른이 되어서든 자신의 일부와 만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 여겨진다. 자기자신의 길로 가는 것은 내부의 자아와 만나 또 다른 자아을 발견해서 자신의 역량을 한층 끌어 올리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마지막 장을 ‘종말의 발단’이라고 명명했다. 최후의 시작이다. 끝은 곧 시작과 연관이 되어 있다. 어둠과 밝음은 늘 돌고 돌며 우리들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공존하고 있는 두 세계에 우리는 우리를 내놓고 적응해야만 한다. 하나의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아무리 아우성치고 몸부림 쳐봐도 하나의 세계만 있다고 누가 인정하겠는가. 결코 이 세계는 하나의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선과 악, 밝음과 어두움, 두 세계는 공존하며 수레바퀴가 굴러가듯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 최선이며 작가의 말처럼 진정한 천직, 자기 자신에게 도달 하는 일이 남는 것이다.

  <데미안>은 작가의 깊은 정신적 세계, 인간 존재의 근원을 거스르는 이원성의 대결이라는 주제를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독자들의 가슴에 굵은 선을 그어 놓는다. 이 책은 한 번 읽어서 다 읽었다고 팽개쳐둘 책이 아니다. 물론 어느 책이 그러하겠는가마는 이 책은 그것을 더 강조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은 정독(精讀)을 요구하고 있다. 정독! 정독!

  나는 이번 <데미안>과의 만남이 나를 한층 성장하게 했으며 앞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될 것임을 믿는다. 이는 참으로 진정한 만남이며 나를 미소 짓게 하는 만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