焚書 7
김근
이곳에 유배된 지 수삼 년 원통도 원망도 꽃 피고 꽃지는 일이나 한가지로 되었는데, 한 날은
저녁참에 사립문 안쪽이 소란스러워 손바닥만 한 뜰에 나섰더니
임금의 용안을 한 물고기가 썰물도 거슬러 기어를 오는 거였더랬다
입을 뻐금거리며 눈알 끔벅거리며 아가미 겨우 여닫으며
결코 한 마리는 아니고 떼로들 몰려서 수많은 용안의 물고기들
사립문 안쪽에서 날이 저물고 새도록 찍찍 울며 파닥파닥거리는 것이었으니
한잠도 자지 못하고, 배는 쓸려 창자 쏟아지면서도 울음 그치잖고
지느러미조차 닳아 앙상한 용안의 물고기 한 마릴 주워 들여다보았으나
그놈의 얼굴 용안이 씌었으되 결 고운 비늘 마다 마다엔 내 얼굴 비춰 있어
그놈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하루 내 전전긍긍하였더랬다
그놈들의 이름은 한 얼굴의 임금 쪽인가 수많은 얼굴의 내 쪽인가 하였으나
감히, 그 이름, 지어내지 못하였는데, 생기를 잃고 피그르르 무너지는 놈들마저도
찍쩍 찍쩍 도무지 울음 그칠 줄 몰랐으므로 죄다 그러모아 솥에 넣고 삶았다
내 얼굴 비춰 있던 비늘이야 죄 털려 떨어졌어도 비린 날것이던 용안은
푹푹 잘 익은 용안이 되었더랬으나, 그예 멈추낳고 장작 한 부석 더 메어
고고 고았더니 용안도 내 얼굴도 간데없고 보얀 국물만 남았다
예부터 용안을 삶아 먹었다는 말은 없거니와 기름기 하나 없는 국물이
보양 될리 만무하다 여겨 시궁으로 흘려보내고 그만 말았다
감히 이름을 지어내지 못하였으니 후세에 이 물고기를 만나서도
그저 이름 없는 물고기라 용도도 맛도 알기 어렵고
백성들이 용안을 알아보기 또한 어려우니, 기록하여 전한들 무에 쓸 데 있겠는가, 하여 이 또한 그만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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