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누기/글마당

아버지의 등을 밀며-손택수

나비 오디세이 2016. 8. 17. 23:12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 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 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 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첫사랑 두근두근>>, 문학과지성사-성장 詩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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