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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 친구, 윤동주, 장준하, 문익환 목사

나비 오디세이 2015. 2. 10. 21:40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윤동주, 문익환, 장준하.

함경북도 유학자 가문들이 공동 이주하여 정착한 만주 명동촌에서 같은해 출생하여 초, 중학교를 같이 다닌 동기입니다.

평양 숭실 중학교 재학 당시 함께 찍은 세 친구의 사진입니다.


맨 오른쪽의 인물은 북간도 명동촌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문학적으로 재능이 있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숭실 중학을 자퇴했습니다(양 옆에 있는 친구들도 함께 자퇴했습니다) 

이후 27세 때인 1943년 일본 도시샤 대학 재학 중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일본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습니다. 이름은 윤동주입니다.

체포되기 직전에 도시샤 대학 동료들과 찍은 사진(1943)/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동료들과 송별식을 하던 자리. 그는 이 자리에서 동료들이 노래 한곡을 청하자 '아리랑'을 불렀다고 참석하였던 여학생이 회고하였다. 



맨 왼쪽에 있는 이는 평안북도 의주 출신입니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 1944년 학도병으로 중국 전선에 끌려갔다가 그해 7월 탈영해 한국 광복군이 됐습니다. 

1945년 국내 진공 작전을 위해 중국 시안에서 미국 정보기관(OSS) 특수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후 김구의 비서로 대한민국에 돌아온 후 "사상계"라는 잡지를 창간해 사회 비판적 글을 썼으며, 1962년 한국인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습니다. 

1967년에는 옥중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유신 체제 시기에는 반유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유신헌법을 개헌해야 한다는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다 긴급조치 1호를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돼 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가 1975년 8월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는 장준하입니다. 

1945년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중국 시안에서 미국 정보기관(OSS) 특수 훈련을 받던 당시의 장준하 선생(오른쪽)


유신 헌법을 개헌해야 한다는 100만인 서명 운동을 펼치다 긴급조치 1호를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돼 재판정에 선 장준하 선생(제일 오른쪽)과 백기완(로른쪽 두 번째) 등. 그는 15년형을 선고 받았다가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가운데 서 있는 분은 윤동주와 동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습니다. 

양 옆에 있는 친구들보다는 그나마 평탄한 길을 걸어, 일본과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쉽게 번역하는 작업에 개신교 대표로 참여하며 성서학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이후 맨 왼쪽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사회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반독재 운동 앞에 섰고 통일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오랜 시간 감옥에 있다가 출옥한 다음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문익환입니다.

1991년 강경대군 장례식을 하며 거리행진중인 문익환 목사(문성근 씨의 부친)



빼앗긴 조국의 독립운동을 하다 죽음을 당한 윤동주,

광복군의 그 모진 세월에도 살아 남았으나 억압받는 국민에게 일생을 바치고 의문사한 장준하,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와 장준하가 죽었으니 이제 내가 죽을 차례다"라고 하셨답니다.


 

동주야

너는 스물 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 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테 너는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문익환-          


출처 : 한국사 사랑방
글쓴이 : 한국사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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