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 어느 맑은 봄날, 친구와 나는 여의도에서 만났다.
그날 윤중로에는 벗꽃이 만발하여 앵화우가 날리고 있었다. 우리는 눈같이 하얀 앵화우를 맞으며
걸었다. 아무 말이 없다. 그래도 우리는 불편하지 않는 사이였고, 잠시 각자의 생각 속으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면 반겨주는 그런 대화가 가능한 친구였다.
어려운 시기를 같이 보냈고, 고통을 같이 겪었다. 하나가 되어 응원도 하고 하나가 되어 달리기도 했다.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달리기도 하고, 서로의 눈짓만으로도 서로를 읽을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만 한몸이 되어 혼연일체가 되어 한 팀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지 않으면 상대팀에게 허를 찔리고 승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것도 알기에 우리는 한솥밥을 먹으며 터득했다. 그러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사회에서 만난 친구와 나는 단짝이 되었다. 그당시 나는 '진정한 친구는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읽을 수 있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말을 지극히 아끼고 있었다. 생각이 많았던 나, 말이 적었던 나. 그런 나를 두고 동기생 하나는 "입에서 냄새 안나?"하고 물을 정도였다. 후일 변화하였지만.
앵화우 맞으며 우정의 반지를 만들어 각자의 약지에 하나씩 나눠 끼웠다. 18K 둥근 원 안쪽에는 J♡L 이라는 이니셜을 새겼다. 미소를 짓던 그 모습 잊을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
자존심이라는 것은 언제 어느 때 필요한 것일까. 그녀의 삶이 암흑에 잠겨 있어도 나는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를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그녀는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우정이란 무엇일까. 반지의 의미는 퇴색하는 것일까. 아직도 반지의 안쪽 이니셜은 그대로 인데......
어디에 있든 그녀의 삶이 구름낀 날보다 태양이 등을 따스하게 비추는 날이 많기를 기도한다. 그녀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고 그렇게 살기를 힘쓰는 자라는 것을 알기에 그러리라 믿는다.
그녀의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이고 머리카락 흰 산을 이룰 때에 자존심이라는 것이 아무짝에 쓸모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까. 아니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삶은 울타리를 쳐 놓고 놓아 주지 않는다.
삶은 마음과 다르게 움직이고 그 움직임은 흐름을 멈추지 않기에 그저 흐르고 있기만 하는 것인지도.
동그라미는 완전함, 부드러움, 합일, 일체감, 완벽함, 높은 꿈, 비상, 등을 떠올린다.
둥근 원은 돌고 돌아 그 끝을 따라다니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다다를 수 있는 여유가 있고 그런 공간을 제공한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밋밋한 우정 반지가, 오랜 세월을 건너 뛰어나를 과거로 데리고 갔다.
아름다운 순간들을 추억한다. 추억은 또다른 추억의 다리를 만들어 주고 하나의 통로를 만들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기억들을 주워 모으게 한다.
반지는 하나의 고리를 만들어 또다른 고리를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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