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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신춘문예 당선 시 모음

나비 오디세이 2018. 1. 27. 14:25

2018년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모음

 

율가(栗家)

 

이소회

 

 

갓 삶은 뜨끈한 밤을 큰 칼로 딱, 갈랐을 때

 

거기 내가 누워있는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레가 처음 들어간 문, 언제나 처음은 쉽게 열리는

 

작은 씨방 작은 알 연한 꿈처럼 함께 자랐네

 

통통하니 쭈글거리며 게을러지도록 얼마나 부지런히 밥과 집을 닮아갔는지

 

참 잘 익은 삶

 

 

딸과 딸과 딸이 둘러 앉아 끝없이 밤을 파먹을 때마다

 

빈 껍질 쌓이고 허공이 차오르고 닫힌 문이 생겨났다

 

말랑한 생활은 솜털 막을 두르고 다시 단단한 문을 여미었다

 

강철 같은 가시는 좀도둑도 막아주었다

 

단단한 씨방 덜컹덜컹 뜨거워지는데

 

온 집을 두드려도 출구가 없네

 

달콤한 나의 집, 차오른 허공이 다시 밥으로 채워질 때, 혹은 연탄가스로 뭉실뭉실 채워질 때

 

죽음은 알밤처럼 완성된다

 

 

죽음은 원래가 씨앗이기 때문이다

 

 

<2018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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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먼 곳

 

박은지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 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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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살

 

조윤진

 

 

입 안 무른 살을 혀로 어루만진다

더없이 말랑하고 얇은 껍질들

사라지는 순간에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세계들이 뭉그러졌는지 세어본다

당연히 알 수 없지

시간은 자랄수록 넓은 등을 가진다

행복과 안도가 같은 말이 되었을 때

배차간격이 긴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타게 되었을 때

광고가 다 지나가버린 상영관에 앉았을 때

나는 그렇게 야위어 간다

뚱뚱한 고양이의 부드러운 등허리를 어루만졌던 일

운동장 구석진 자리까지 빼놓지 않고 걷던 일

그런 건 정말 오랜 일이 되어

전자레인지에 돌린 우유의 하얀 막처럼

손끝만 대어도 쉽게 쭈그러지지

톡 건드리기만 해도 감당할 수 없어지는

만들다 만 도미노가 떠올라 나는

못 다 한 최선 때문에 자주 울었다

잘못을 빌었다

눈을 찌푸릴수록 선명해지는 세계

얼마나 더 이곳에 머무르게 될 지

아직 알 수 없지

부드럽게 돋아났던 여린 세계들

그런 세계들이 정말 있었던 걸까

 

      

 

<2018 한경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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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바스에서

 

 

박정은

 

 

 

 

 

왁자지껄함이 사라졌다 아이는 다 컸고 태어나는 아이도 없다 어느 크레바스에 빠졌길래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 제 몸을 깎아 우는 빙하 탓에 크레바스는 더욱 깊어진다 햇빛은 얇게 저며져 얼음 안에 갇혀 있다 햇빛은 수인(囚人)처럼 두 손으로 얼음벽을 친다 내 작은 방 위로 녹은 빙하물이 쏟아진다

 

 

 

꽁꽁 언 두 개의 대륙 사이를 건너다 미끄러졌다 실패한 탐험가가 얼어붙어 있는 곳 침묵은 소리를 급속 냉동시키면서 낙하한다 어디에서도 침묵의 얼룩을 찾을 수 없는 실종상태가 지속된다 음소거를 하고 남극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 내레이션이 없어서 자유롭게 떨어질 수 있었다 추락 자체가 일종의 해석, 자신에게 들려주는 해설이었으므로

 

 

 

크레바스에 떨어지지 않은 나의 그림자가 위에서 내려다본다 구멍 속으로 콸콸 쏟아지는 녹슨 피리소리를 들려준다 새파랗게 질린 채 둥둥 떠다니는 빙하조각을 집어먹었다 그 안에 든 햇빛을 먹으며 고독도 요기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얼음 속에 갇힌 소리를 깨부수기 위해 실패한 탐험가처럼 생환일지를 쓰기로 한다 햇빛에 발이 시렵다

 

 

 

 

 

 

<2018 경향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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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문서

 

이린아

 

 

잠자는 돌은 언제 증언대에 설까?

 

돌은 가장 오래된 증인이자 확고한 증언대야. 돌에는 무수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어. 하물며 짐승의 발자국부터 풀꽃의 여름부터 순간의 빗방울까지 보관되어 있어.

 

돌은 한때 단죄의 기준이었어.

 

비난하는 청중이었고 항거하는 행동이었어.

 

 

돌은 그래.

 

인간이 아직 맡지 못하는 숨이 있다면 그건 돌의 숨이야. 오래된 공중을 비상하는 기억이 있는 돌은 날아오르려 점화를 꿈꾼다는 것을 알고 있어.

 

돌은 바람을 몸에 새기고 물의 흐름도 몸에 새기고 움푹한 곳을 만들어 구름의 척후가 되기도 해. 덜어내는 일을 일러 부스러기라고 해. 하찮고 심심한 것들에게 세상 전부의 색을 섞어 딱딱하게 말려 놓았어. 아무 무게도 나가지 않는 저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것도 사실은 인간이 쌓은 저 딱딱한 돌의 축대들 때문일 거야.

 

잠자던 돌이 결심을 하면 뾰족했던 돌은 뭉툭한 증언을 쏟아낼 것이고 둥그런 돌은 굴러가는 증언을 할 거야.

 

단단하고 매끈한 곁을 내주고 스스로 배회하는

 

 

돌들의 꿈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굴러다닌 거야.

 

아무런 체중도 나가지 않을 때까지.

 

 

 

<2018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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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2018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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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변선우

 

 

 

나는 기나긴 몸짓이다 흥건하게 엎질러져 있고 그렇담 액체인걸까 어딘가로 흐르고 있고 흐른다는 건 결국인 걸까 힘을 다해 펼쳐져 있다 그렇담 일기인 걸까 저 두 발은 두 눈을 써내려가는 걸까 드러낼 자신이 없고 드러낼 문장이 없다 나는 손이 있었다면 총을 쏘아보았을 것이다 꽝! 하는 소리와 살아나는 사람들, 나는 기뻐할 수 있을까 그렇담 사람인 걸까 질투는 씹어 삼키는 걸까 살아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까 고래가 나를 건너간다 고래의 두 발은 내 아래에서 자유롭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래의 이야기는 시작도 안했으며 채식을 시작한 고래가 있다 저 끝에 과수원이 있다 고래는 풀밭에 매달려 나를 읽어내린다 나의 미래는 거기에 적혀있을까 나의 몸이 다시 시작되고 잘려지고 이어지는데 과일들은 입을 지우지 않는다 고래의 고향이 싱싱해지는 신호인 걸까 멀어지는 장면에서 검정이 튀어 오른다 내가 저걸 건너간다면복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무수한 과일이 열리고 있다 그 안에 무수한 손잡이

 

 

 

   

 

<2018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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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을 묻다

 

 

김형수

 

 

이천여 년 전의 방가지똥 씨앗이

스스로 발아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한 해밖에 못 사는 풀이 때를 기다린 것이다

 

 

사랑할 만한 세상이 오지 않아

이천 년 동안 눈 감은 태연함이라니

고작 일 년 살자고 이천 년을 깜깜 세상 잠잤다니

 

 

그런 일이 어찌 꽃만의 일이랴

우리도 한 천 년쯤 자다가

살고 싶은 세상이 왔을 때 눈 뜨면 어떨까

 

 

사람이 세상을 가려 올 수 없으니

땅에 엎드린 바랭이들 한 천 년쯤 작정하고

나무를 묻었다는 매향埋香의 기록

 

, 어느 어진 왕이 천 년 후를 도모했던가

침향이 되면 누구라도 꺼내 아름다운 향기로 살라고

백 년도 아닌 천 년을 걸어 나무를 묻었단다

그것은 사람이 땅에 심은 방가지똥이었다

 

 

한 해 지어 한 해 먹던 풀들이

천 년 후의 나무 씨를 뿌렸다는,

우리 오천 년 역사에서 가장 뿌듯한 매향에 관한 몇 줄의 글

읽고 또 읽고

노오란 꽃을 든 미륵이 눈에 어른거렸다

 

 

 

<2018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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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의 공식

 

 

우남정

 

 

접힌 표정이 펴지는 사이, 실금이 간다

 

 

시간이 불어가는 쪽으로 슬며시 굽어드는 물결

무심코 바라본 먼 곳이 아찔하게 흔들리고 가까운 일은 그로테스크해지는 것이다

 

 

다래끼를 앓았던 눈꺼풀이 좁쌀만 한 흉터를 불쑥 내민다 눈꼬리는 부챗살을 펼친다 협곡을 따라 어느 행성의 분화구 같은 땀구멍들, 열꽃 흐드러졌던 웅덩이 아직 깊다

 

 

밤이라는 돋보기가 적막을 묻혀온다 달빛이 슬픔을 구부린다 확실한 건 동근 원 안에 든 오늘뿐, 오무래미에 샛강이 흘러드는 소리, 쭈뼛거리는 머리카락이 먼 소식을 듣고 있다 몰라도 좋을 것까지 확대하는 버릇을 나무라지 않겠다

 

 

웃어본다 찡그려본다 쓸쓸한 표정을 지어본다

()에도 자주 눈물을 주어야겠다고,

청록 빛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지금 누가 나를 연주하는지

주름이 아코디언처럼 펴졌다 접어진다

 

 

분청다기에 찻잎을 우리며

실금에 배어드는 다향(茶香)을 유심히 바라본다

 

 

먼 어느 날의 나에게 금이 가고 있다

무수한 금이 금을 부축하며 아득히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2018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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