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동굴

그녀의 말

나비 오디세이 2006. 5. 7. 22:29


 

당신이 내게 말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이지요.

봄의 소리 여름의 소리 가을의 소리 겨울의 소리.

계절마다 다르게 내 귓가에 들리는 소리들이 내게는 당신을 느끼는 가장 소중한

순간들이며 동시에 사랑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엊그제 그런 당신의 기일을 맞이 하여 그 세월이 벌써 9년이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단아하고 자그마한 당신의 어깨를 닮은

등성이에 누군지 모를 이 있을 곳에 꿈꾸듯 무리지어 피어 난

진보라 연보라의 산제비꽃들이 나를 부르더이다.

당신처럼.

그 자리에 오두마니 서서 당신이 나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져

나는 가던 길 멈추고 서서

당신을 보듯 아담하고 봉긋한 그 무덤가에 한 참을 서성이었습니다.

 

꽃무덤.

그곳을 보고 당신 계신 곳에도 꽃으로 치장을 하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을 읽었을까요.

오빠가 꽃으로 주변을 장식하고 작은 측백나무까지 심어 두었더군요.

기쁘셨지요.

 

당신이 살아 계실 때 어느 날인가 제게 말했던 것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네 아버지 뒤에 여자가 한 명 있단다."

당신의 사주를 보고 와서 무심히 내 던진 말씀이었지요.

나는 그 당시 어렸고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스쳐 지나가고 말았는줄 알았는데 기억 저편에 묻혀 있었나 봅니다.

이 나이 먹어 당신을 떠올리고 지금 현재를 돌이켜보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의 두 며느리는 당신의 제수 음식들을 장만하지 못할 상황이어서

당신이 말한 아버지 뒤의 여인이 당신의 영혼이 드실 제수 음식들을 장만하고

우리들은 그것을 진설하는 일을 하였지요. 인생이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준비하는 손길, 그 마음의 깊이 헤아릴 길은 없지만

세상을 살아 보니 이해 못할 일도 없음을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이해한다', '이해 못한다' 이런 개념의 일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이해 이전에 받아 들여야 하는 일들도 많음을.

이해의 차원을 벗어나는 삶이 점점 그 깊이를 더해 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 틀 안에 고정되어 있던 것들이 하나하나 부서지고

일그러지고 당신 닮은 보름달이 이지러질 때가 많음을 아시지요.

바위를 파 먹고 자라는 소나무를 나무랄 수 있을까요.

무엇이라고 나무랄까요. 그 소나무는 바위가 땅이고 어미인데

태중의 태아 인데 그것을 나무랄 수 있을까요. 거기서 왜 정착했느냐고.

인생이란 그런 것인 것을.

 

어느 누구의 생이든 아름다운 것은 존재하고 아름답게 치장 할 권리는 가지고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겠지요.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당신의 말의 내 귓가에 맴도는 날입니다.

"아버지 뒤에 여자가 한 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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