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빈 속에 향이 가득한 커피를 마신다. 나른하고 아직 잠이 덜깬 상태에서
마시는 그 커피는 내 몸을 깨어나게 한다. 그 맛, 그 향, 그 기분이 참 좋다. 그렇게 아침을 시작한다.
오늘은 이상했다. 여느 때와 다르게 커피가 식도를 타고 한 모금 넘어가는 순간
슬픔이 온몸에 파고 들어왔다. 어찌하지 못하고 울었다. 슬픔. 왜 슬픔은 갑자기 소리없이
다가오는 것일까. 전조도 없이. 기미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온 신경을 마비시키고
마는 것일까. 정지. 나의 몸과 나의 사고가 정지된 상태에서 나는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나의 지난 날들을...
눈물이 짜다. 짠 눈물을 맛보았다. 그 눈물이 모든 것을 씻어 줄 수 있다면...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빈 시간이 있으면 안 되었다. 설거지를 하고 씽크대의 묵은때를
박박 문지른다. 가스렌지의 묵은때도 박박 문지른다. 깨끗해진다. 잠시 기분도 환해진다.
물이 고맙다. 손이 고맙다. 그들은 정직하다.
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물이 되어 씻어 낼 수 있는 모든 것 다 씻어 주고 싶다.
먼저 나의 마음을 세심(洗心)하는 일부터 하고 싶다. 누구를 씻어주는 일은
다른 누구에게 맡기고 나는 나를 먼저 씻어야 한다. 누굴 씻어 줄 자격이 있단 말인가.
과연 어느 누가 어느 누구를 씻어 줄 수 있겠는가.
누구나 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씻는 것이 우선이겠지.
길가에 피어 있는 달개비를 본다. 청남색 꽃잎 두장이 애잔하게 보인다.
가녀린 그 꽃, 그 달개비가 나를 보고 웃고 있다. 새벽에 피어나 낮이면 힘없이 지는 그 꽃.
암수가 한 몸에 있어 자가수정이 가능하고 또 바람에 의해 수정이 가능한 두해살이 풀.
잡초처럼 길가 한 켠에서 소리없이 피었다가 또 소리없이 스러지는 그 꽃이 사랑스럽다.
그 꽃을 한 송이 꺾었다. 약하다. 연하다. 작다. 꽃잎이 내 새끼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다.
그러다 그 약한 것이 때가 되면 피어나 제자리를 지켜낸다. 그리고 또 때가 되면 떠날 줄을 안다.
누가 뭐라해도 자기가 할 일을 하면서 조용히 웃고 있는 그 작은 꽃이
나를 가르친다. 나의 선생이다.
내 슬픔에 대해서 너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겠지. 그러나 말을 아끼고 그저 미소로 나를 대했지.
그리고 네 할 일을 꾸준히 충실히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지. 그것이 곧 삶이라고.
큰 소리 내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그게 너의 힘이지.
빈수레가 요란하고 강하면 부러지는 이치를 너를 알고 있었던 게야.
연약한 너로부터 강함을 배운다. 이치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