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경전-이덕규 밥그릇 경전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 생각나누기/글마당 2017.02.07
여승/ 백석 여승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 생각나누기/글마당 2016.12.19
자화상-서정주 자화상 서정주 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 생각나누기/글마당 2016.11.21
술도가가 있는 골목-문성해 술도가가 있는 골목 문성해 산사춘 복분자 오가피주 백세주 매실주는 물론이거니와 막걸리 한 병을 마시다가도 그 병을 들어 만든 곳을 확인하는 일 그때마다 나는 경상북도 문경의 어느 오래된 술도가 골목을 더듬더듬 헤매지도 않고 흘러들어가게 된다 산사나무 열매나 복분자 오가피.. 생각나누기/글마당 2016.11.14
비-김혜순 비 김혜순 하늘에서 투명한 개미들이 쏟아진다. 머리에 개미의 발톱이 박힌다 투명한 개미들이 투명한 다리로 내 몸에 구멍을 뚫는다 마구 뚫는다 그를 떠밀면 떠밀수록 그는 나를 둘러싸고 오히려 나를 결박한다 내 심장의 화면에 투명한 글자들이 새겨진다 나는 해독하지 못한다 글자.. 생각나누기/글마당 2016.11.13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정일근 제 1 신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 생각나누기/글마당 2016.10.17
도공 詩 도공 詩 천양희 어느 도공은 마음을 빚어 백자를 얻었다 마음을 빚을 때는 아궁이에 장작불 피우고 호반 위에 떠오르는 달빛을 방안까지 맞아들였다 아침저녁 물가에 앉아 물안개 보고 나무 밑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었다 어느 도공은 흙을 빚어 백자를 얻었다 흙을 빚을 때는 마음자리.. 생각나누기/글마당 2016.10.16
자화상-천양희 자화상 천양희 조롱 속에 거울 하나 넣어놓았더니 거울에 비친 제 모양을 제 짝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살았다는 문조文鳥 사막 속에 오아시스 놓여 있었더니 물에 비친 모랫길을 제 길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걸었다는 낙타 그게 혹 내가 아니었을까 <<너무 많은 입>>, 창비 생각나누기/글마당 2016.10.16
그대가 오기 전날-나희덕 그대가 오기 전날 나희덕 그동안 나에게는 열망하는 바가 얼마나 많았더냐 오랜 줄다리기, 그 줄을 내려놓고 이제 두 손을 털면 하늘마저 가까이 내려와 숨을 내쉰다 그러나 나에게는 망설이던 적이 얼마나 많았더냐 진흙탕 속을 걸어가면서도 발목 하나 빠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다가 .. 생각나누기/글마당 2016.10.16
추일서정-김광균 추일서정 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 생각나누기/글마당 2016.09.27